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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리뷰 - 스토브리그 ..카테고리 없음 2020. 6. 28. 14:52
한국에서 스포츠 드라마가 성공을 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접하지도 못한 <마지막 승부>가 1994년작이니 현재 드라마 주 소비층으로 올라온 2049 세대에게 스포츠 드라마에 대한 인식은 곧 '망하는 게 당연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오랜 징크스를 깬 것이 2020년 2월 14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스토브리그>입니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수성했고, 방영 직후엔 드라마에 관련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제 주변인들도 이 드라마는 본방을 챙겨보곤 했습니다. 심지어 한국 드라마를 여태껏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까지 말입니다. 저 역시 <스토브리그>에 관한 흥미가 크게 동했지만, 이미 초반 화들을 놓친 후였고, 다음 화를 기다리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에 완결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번에 정주행을 완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맨땅에 헤딩>,<2009 외인구단> 등이 화려하게(?) 수놓은 스포츠 드라마 잔혹사를 끊을만한 작품이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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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줄거리KPB 리그에서 4년째 최하위를 도맡아 하고있는 재송 드림즈는 팀 안팎으로 수많은 악재를 겪고 있습니다. 야구단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모기업 재송그룹, 의욕을 상실한 프런트, 파벌싸움을 하고있는 코치진, 위닝 멘탈리티가 실종된 선수단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인도, 기업인도 아닌 백승수가 공개면접을 통해 단장에 취임합니다. 그는 실업 씨름단, 아이스하키 팀, 핸드볼 팀의 단장으로 이들을 모두 우승으로 이끈 바 있는 '우승 청부사'입니다. 하지만, 그가 맡았던 팀들은 모두 '우승 후 해체'를 하는 기이한 징크스가 따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재송그룹 측 인사인 권경민 구단주 대행은 이 징크스를 눈여겨보고 최대한 잡음이 없는 야구단 '해체'를 위해 백승수를 단장으로 기용합니다. 반면 백 단장은 '우승'에 방점을 두고 팀의 체질을 개혁해 나갑니다. 백 단장은 이제 자신 밑에 있는 프런트 및 야구팀을 정비하면서, 동시에 자신 위에 있는 모기업 측 인사들의 압력을 견뎌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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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장점 - 현실고증드라마 흥행과 관계없이 역대 스포츠 드라마 중 고증이 뛰어난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승부>조차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손지창 슛' 장면이 나온 바 있고, 축구 드라마 <맨땅에 헤딩>에서는 자신이 크로스를 올리고 그 공을 자신이 발리슈팅으로 연결하는 유노윤호가 등장했습니다. 격투기를 소재로 삼은 <쌈,마이웨이>에서도 격투기는 멜로의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로는 큰 비중을 갖지 못했습니다. <트리플>, <2009 외인구단> 등으로 시선을 넓혀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토브리그>가 가진 최고의 강점은 여기서 나옵니다. 종목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초반부터 '스포츠 드라마가 아닌 오피스 드라마'라는 표어를 쓸 정도로 非야구팬들을 포용하는 데 공을 들였지만 그렇다고 야구팬들을 등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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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 스토브리그 기간에 방영되었습니다.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기간, 마치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듯한 스토브리그 이야기는 현실감을 자극했고, 야구에 목마른 프로야구 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물론 타이밍 하나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었습니다. 야구계에서도 최신 트렌드인 세이버메트릭스를 활용해 선수를 평가하는 장면이나, 익숙한 디자인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 나오는 등 '한번 봐 줄까' 하고 TV앞에 모인 야구팬들을 붙잡아 놓을만한 요소들이 충분했습니다. 제작진이 '야잘알'이라는 점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수많은 장면들을 통해 증명됩니다. <스토브리그>의 주요 팀들은 각각 다른 팀컬러를 갖고 있어서 이들끼리 트레이드를 진행했을 때 수많은 변수가 작용합니다. 세계관 뿐 아니라 야구에도 정통해야 가능한 설정입니다. 여태껏 나왔던 어떤 스포츠 드라마보다 종목에 대한 깊은 관심이 드러나 있기에, 극적 효과를 위해 과장된 갈등 양상도 '그래, 드라마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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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장점 - 고전적인 기대치 충족연이은 폭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스포츠 드라마가 크랭크인 하는 것은 '감성을 자극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부딪치는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은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슬램덩크>를 비롯한 수많은 스포츠 만화들이 성공가도를 달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퍼펙트 게임>, <슈퍼스타 감사용>의 세일즈 포인트도 이 점이었습니다. 하도 많이 쓰여 적당한 배경음악에 짧은 컷 편집으로 운동하는 장면, 중요한 경기에서 멋진 말 몇 마디나 과거 회상으로 정신을 차리는 클리셰가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을 보고싶어 합니다. 많은 스포츠 드라마와 차별점을 두고 있는 <스토브리그>지만, 이런 고전적인 기대 역시 충족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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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드라마 치고 선수들의 비중이 작은 편이지만 주요 선수 임동규, 강두기, 장진우, 길창주, 유민호 등의 선수는 각자 매력적인 스토리를 빚어냅니다.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길창주의 국적 문제, 유민호의 입스 문제는 야구팬들에겐 받아들이기 쉬우면서도, 非야구팬들에겐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스포츠 드라마 하면 맨날 고민하는 '생계vs꿈' 혹은 '부상vs꿈' 같은 천편일률적 구도를 피한 갈등양상은 이 드라마를 충분히 특별하게 만듭니다. 장진우가 구단과 빚는 갈등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다소 전형적이긴 하지만 그 양상을 무리하게 확장해 신파를 자극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정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먼 세상 이야기라고 느꼈던 스포츠 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백승수 단장 이하 사무직 직원들의 열정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기대는 고전적이지만 그 기대를 충족하는 방식은 충분히 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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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와 일하지 않는다'는 백승수 단장의 말처럼, 무리한 멜로드라마적 진행을 경계하려는 안배가 보입니다. 백 단장의 가정 배경이 늦은 시점에 짧게 다뤄진 것도 그렇고, 유민호의 할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백 단장이 인간관계에 관심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듯, 다뤄야 할 갈등 양상은 충분히 짚고 넘어갑니다. '휴머니스트와 일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면 드라마의 진행 방식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연민을 갖지 말라'라는 뜻이 아닌, '감정에 휘둘려 원칙과 이성을 무시한 일처리를 하지 말라'라는 의미였던 위 대사는, <스토브리그> 제작진이 역대 스포츠 드라마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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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대잔치 시절 <마지막 승부>, 김연아 선수의 전성기 시절 <트리플>이 전파를 탄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류를 타고 새로운 팬층을 유입시키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이렇게 유행을 타고 한 탕 벌여보려는 드라마가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고 있는 모습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판박이이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나왔던 스포츠 드라마의 플롯에는 '공식'이 있습니다. 특정 종목에 재능이나 흥미가 있는 주인공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외부적 요인으로 운동을 계속해도 될 지 고민도 하고, 매니저 혹은 자신의 꿈을 존중하는 인물과 연애도 하고, 결국 목표를 이루든 못 이루든 결승전이나 최종전 근처에서 엔딩을 맞습니다. '종목에 대한 고증이 부족하다'는 점과 맞물려, 이 드라마들에서 주인공들의 노력이란 게 대부분 적당한 배경음악에 짧은 컷 편집으로 때워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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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성만을 자극하기 위해 등장했던 수많은 스포츠 드라마들이 실패한 것은 그닥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시청자층의 감성을 자극하려면 너무 매니악한 내용은 피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종목 팬에게는 깊이가 얕은 작품이 됩니다. 이렇게 스포츠의 비중이 작아지다 보면 일반 시청자층에게는 이 스포츠 파트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설득시키기 어렵습니다. '시류를 타고 팬층을 끌어모은다'라는 논리에 오히려 자승자박하는 꼴입니다. '감정에 휘둘려 원칙과 이성을 무시한' 드라마의 말로란 대개 이렇습니다. <스토브리그>를 빛낸 것은 감성에 치우치지 않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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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단점 - 설정 구멍현실성을 무기로 삼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설정구멍이 더 뼈아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백승수 단장의 사기와도 같은 기망행위에 대한 책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임동규 트레이드 당시 그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트레이드를 강행한 행위는 명백한 잘못이며,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후속 트레이드로 '하자 상품'을 되돌려받고 쓸만한 카드를내주긴 하지만 결국 '윈-윈 트레이드'의 성격이 강하고, 이는 결국 기망행위를 한 쪽에서 다시 이득을 챙겨가는 구조의 후속조치란 뜻이 됩니다. 드라마 주인공이 꼭 착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월권을 일삼는 상대의 약점을 잡고 협박할 수도 있고, 정적의 부하직원에게 배신을 사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착한 것으로 포장되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스토브리그>처럼 현실성이 높은 작품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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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잘 모르는 시청자층 역시 포섭하려는 의도가 강한 작품입니다. 단장은 트레이드 중간에 기망행위를 섞고, 그것으로 다시 이득을 챙겨갑니다. 팀의 결속력을 위해 무리한 훈련 방침을 밀어붙이는 등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인 바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는 딱히 없습니다. 하다 못해 백 단장의 캐릭터에서 선악을 넘나드는 트위너적 성격이 좀더 부각되기라도 했다면 크게 문제시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10화 넘게 착한 일만 해온 백 단장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백 단장의 트레이드 추진이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부분이 다소 소홀했습니다. 야구팬들이야 알고 있겠지만, 이 드라마로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새로운 시청자들은 좀 비약해서 '원래 트레이드는 저렇게 사기매물 교환 장터 같은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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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 특별편에서 제작진이 신경썼던 디테일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임동규의 과거 장면에서 조명의 위치, 백 단장 집의 소품들 같은 부분은 확실히 치밀하게 준비된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디테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마운드 아래 김광현'이란 수식어입니다. 문제시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운드 위 김광현'은 어디 갔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김광현이란 이름이 칭찬으로 쓰이는 걸 보면 분명 KPB에도 어느 정도 족적을 남겼을 텐데, 왜 이 선수에 대한 추가적인 발언은 일언반구 없는 것인지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드라마 제작을 물심양면 지원한 SK와이번스에 대한 헌정 멘트 정도로 생각됩니다만, 이 한 마디로 인해 <스토브리그> 세계관에 의문부호가 붙습니다. 마치 <포켓몬스터> 세계관 내에서 포켓몬과 섞여있는 인도코끼리를 보는 듯한 위화감입니다. 그리고 후에 이 인도코끼리 설정은 사라졌습니다. 제작진이 오류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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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의문점(?) - GM과의 유사성상당히 새로운 드라마인 것은 맞습니다만, 최훈 작가의
을 읽어본 독자라면 꽤 친숙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시즌기 프런트 이야기, 야구단 모기업 인사들의 속셈, 취임 직후부터 트레이드를 통해 풍파를 일으키는 신임 단장, 약물 스캔들 등 을 떠올리게 만들 요소가 충분합니다. 제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모티브를 얻지 않는 한 불가능한 유사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진 측에서는 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은 아닙니다. 해당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불명이고, 드라마와 웹툰의 유사성이 표절을 의심케 할 정도로 결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유사 작품을 향한 발언이 언론을 통해 와전되기라도 할 경우의후폭풍을 감안하면 굳이 웹툰을 언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좋은 방어수단일 수는 있어도 논쟁을 끝낼 힘은 없습니다. 만약 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면 에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나눌 수 있도록 한번쯤 언급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과 상관이 없다면 이 문단 전체가 아무 의미 없는 글이 될 겁니다. >
드라마는 새로운 종목, 새로운 구단으로 향하는 백승수 단장의 뒷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한 타 종목 관계자들은 자신이 종사하는 종목으로 <스토브리그> 차기 시즌을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습니다. 그럴 만한 작품입니다. 리얼리티가 살아있고, 식상하지도 않고, 스포츠 드라마의 한계를 넘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비록 남궁민 배우는 SNS를 통해 백승수 단장과 굿바이를 선언했지만, 언제든 그의 복귀를 기다리는 수많은 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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